본문 바로가기

통계 자료, 보고서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7가지 원칙


출처: http://www.leejeonghwan.com/?p=3569&fbclid=IwAR1ZSFMX_G4JfoQAJWzgXGSd6D92GcPiGEixrWzfQ7PMgL08Xx5aA63rBDg 



잊을만하면 떠도는 가짜 뉴스 가운데 장기적출 괴담이라는 게 있다. 파티에서 잘 생긴 남자(또는 예쁜 여자)를 만나서 호텔 방에 따라갔는데 술 한 잔 마시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서 보니 얼음이 가득 담긴 욕조에 누워있더라는 이야기. 욕조 근처에 붉은 글씨로 메모가 붙어 있어서 보니 “119로 연락해라, 아니면 너는 죽는다”라고 적혀 있다. 알고 보니 잠든 사이에 옆구리를 가르고 콩팥을 떼어간 다음 얼음 욕조에 담궈 둔 것이다.


조직행동론의 권위자, 칩 히스와 댄 히스 형제가 쓴 ‘스틱! 1초 만에 착 달라붙는 메시지, 그 안에 숨은 6가지 법칙’이란 책 첫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다. “가장 성공한 도시 괴담”으로 꼽히는 이 이야기는 한국 언론에도 여러 차례 진짜 기사로 등장한 적 있다. 이 이야기는 수백 가지의 다른 버전이 있는데 세 가지 포인트는 동일하다. 첫째, 약을 탄 술, 둘째, 얼음으로 가득 찬 욕조, 그리고 콩팥 적출이다.


이 책에서는 성공하는 이야기의 여섯 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Simple(간단하게), 둘째, unexpected(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셋째, concrete(구체적으로), 넷째, credible(믿을 만하게), 다섯째, emotional(감정에 호소해서), 여섯째, stories(이야기)로 풀어내라는 것이다. 장기적출 괴담은 SUCCESs의 여섯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최고의 낚시질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굉장히 강렬하면서도 기억하기 쉽다. 이런 이야기 들어봤어? 친구들과 정수기 앞에서 가볍게 이야기를 건네기에도 좋다. 매력적인 이성과의 원 나잇 스탠드가 만든 예측 불허의 끔찍한 결말, 어딘가 실제로 있을 법한 일이면서도 끝없이 공포를 자극하는, 그야말로 ‘딱 달라붙는(move to stick)’ 이야기다. 우리가 열광하는 이야기들, 실제로 세상을 뒤흔드는 이야기들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딱 달라붙는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SBS가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목포 부동산 투기 의혹을 보도한 지난 1월15일 이후 한 달 가까이 손혜원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기사가 1만5000건 이상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종류의 기사는 기사 가치와 별개로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고 이슈의 흐름을 뒤바꿔 놓을 때도 많다. 같은 기간 동안 재판 청탁 의혹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같은 당 서영교 의원의 기사는 3000건이 조금 넘는 정도에 그쳤다.


SBS는 손 의원이 목포 대의동 일대에 문화재 거리가 지정되기 전에 친척과 측근을 내세워 인근의 부동산을 대거 매입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국회의원만 알고 있는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이용했을 가능성과 국정감사에서의 문제의 발언, 차명으로 부동산을 거래한 정황, 그리고 인근 부동산 가격이 네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는 코멘트 등 ‘섹시한’ 기사가 계속 쏟아졌고 다른 언론의 후속 보도도 잇따랐다.


물론 손 의원이 오해 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고 이익 충돌 논란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SBS 보도에는 손 의원이 조카에게 부동산 매입 자금을 증여하면서 증여세를 모두 납부했다는 사실이 빠져 있었다. SBS는 문제의 건물 9채가 다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이라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네 배나 올랐다는 코멘트를 인용하면서도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지 않았다.


만약 SBS가 이런 맥락을 충실하게 보도했다면 기사의 파장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SBS 보도가 던지는 메시지는 집권 여당의 실세 의원이 개발 호재를 미리 알고 주변 사람들을 동원해 차명으로 부동산을 매입하고 국정감사 등에서 이 지역에 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부동산 가격이 뛰어올라 큰 이익을 봤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분노를 끌어올리는 탐사 보도 기사였다.


SBS가 의도적으로 사실 관계를 누락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많은 기자들이 빠지는 함정이 기사의 ‘야마’를 위해 사실을 가감하거나 경중을 가르는 것이다. ‘야마’는 산(山)을 뜻하는 일본 말, ‘야마(やま)’에서 유래한 언론계 속어다. 주제 또는 핵심 등의 말로 바꿔 쓸 수도 있겠지만 흔히 ‘야마를 잡는다’고 하면 단순히 주제를 부각시키는 정도를 넘어 핵심을 강조하고 기자의 관점을 강하게 드러내는 기사 쓰기 방식을 말한다. (부득이하게 속어를 쓰는 걸 양해해 주길 바란다. 바꿔야 할 문화지만 이 글에서는 더 정확한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야마’가 강한 글은 잘 읽힌다. SBS 보도는 “손혜원이 차명으로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강력한 ‘야마’가 있었기 때문에 폭발적인 화제가 됐던 것이다. 차명 거래로 보기 어렵다거나 투기인지 아닌지 논란이 된다거나 애초에 부동산 투기 보다는 이익 충돌을 야마로 잡았다면 재미없는 기사가 됐을 것이고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말이냐는 정도의 반응과 함께 쉽게 사그라들었을 수도 있다. 기자들이 ‘야마’의 함정에 빠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강력한 이야기는 강력한 ‘야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SBS는 스스로가 잡은 ‘야마’에 경도돼 반론을 듣는 데 소홀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종종 뉴스가 뉴스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SBS는 손 의원의 투기 의혹이 논란이 되자 투기 의혹이 아니라 이익 충돌을 문제 삼은 것이라고 물러섰지만 언론이 기사에 대한 해명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미 실패한 것이다. 강력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강력한 ‘야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손혜원 기사가 수천 건씩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오히려 더욱 강력한 이야기는 SBS의 보도가 적절했는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손혜원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사라지고 있는 이슈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선한 의도’였다는 손 의원의 해명과 달리 애초에 의도는 중요한 게 아니고 법적 처벌과 별개로 손 의원의 행동이 지탄 받을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짚는 기사도 필요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언론사 데스크라고 생각해 보자. SBS 보도 이후 쏟아진 1만5000여 건의 기사는 이미 터진 이슈를 추격할 뿐 아무런 새로운 사실도 관점도 담지 못하는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뉴스가 뉴스를 만들고 뉴스가 이슈를 키우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가 보고 듣는 뉴스의 상당 부분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키워지면서 급기야 꼬리가 몸통을 뒤흔드는 지경에 이른다.


미디어 산업 전반에 걸쳐 콘텐츠 패키지가 해체된 지 오래지만 대부분 언론사가 여전히 패키지 방식의 생산 시스템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 인사가 법정에 출석할 때 구름처럼 기자들이 모여들고 포토 라인을 가리지 말라며 아우성을 치는 것도 익숙한 장면이지만 결국 경쟁력 없는 컨베이어 벨트에 중복해서 과잉 투자를 하고 있는 답답한 현실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는 유통 기한이 매우 짧거나 대부분은 만들자마자 버려진다. 거의 똑같은 수백 건의 기사, 내일이면 아무도 찾지 않을 그저그런 일과성 기사에 열정 넘치고 사명감 넘치는 기자들을 몰아넣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약간씩 다르고 중요한 논조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많은 독자들이 그런 차이를 의식하지 않으며 그런 차이를 찾기 위해 콘텐츠를 패키지 단위로 구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러 언론사 전략 담당자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거나 컨설팅을 할 때가 많다. 2013년부터 구독 매출이 광고 매출을 뛰어넘은 뉴욕타임즈의 사례나 디지털 전환을 서두르고 있는 워싱턴포스트 등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은 쉽다. 쿼츠나 디인포메이션, 악시오스 같은 해외 사례들, 닷페이스나 더파크, 디에디트 같은 눈부신 스타트업 사례들을 늘어놓는 것도 쉽다.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질문은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다.


바뀌지 않는 데스크들과 낡은 콘텐츠 생산 방식.


불편한 진실 하나는 변신에 성공한 언론사들이 혹독한 구조조정을 치렀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이후 여섯 차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017년에는 100명 감축을 목표로 1300명 가운데 87명에게 희망퇴직을 받았고 23명을 해고했다. BBC 역시 2011년 말 1만9767명에서 2016년 말 기준 1만8920명으로 847명을 줄였다. 보도본부 소속 8100명 가운데 415명을 정리 해고하고, 디지털 뉴스 부분에 195명을 새로 채용했다.


에밀리오 가르시아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1000번의 실패를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동영상을 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에게서 배우라고 할 만큼 엄청난 실패를 했죠.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동영상이었어요. 이런 걸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아무도 공유하지 않았죠. 정말 끔찍했어요. 저도 공유하지 않았어요. 이 사람들을 내보내고 새로운 그룹을 고용했고 지금은 훨씬 나은 동영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의 ‘레거시(유물)’ 미디어들이 당면한 딜레마는 사람을 자를 수도 없고 자른다고 해도 당장 새로운 사람을 뽑을 수 없다는 데 있다. 학교에서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르쳐 주는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언론사에 잘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스카우트라도 해오겠지만 모든 언론사가 고민하는 문제다. 결국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직접 노하우를 터득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여러 언론사들에 이렇게 조언하곤 한다. “새로운 뭔가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낡고 경쟁력 없는 것들을 버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만들자 마자 버려지는 기사, 경쟁력 없는 기사를 만들지 않는 것부터 혁신을 시작해야 합니다. 똑같은 100개의 기사 가운데 하나를 더 얹는 방식으로는 이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출입처 시스템을 깨야 합니다. 제작 현장을 바꾸지 않으면 생산물도 바뀌지 않습니다.”


이제 뉴스가 다음날 아침에 예쁘게 포장돼서 배달되는 시대가 아니다. 날 것의 사실이 먼저 터져 나오고 뉴스에 살이 붙고 코멘트가 붙고 사실과 사실이 만나 의미가 부여되면서 그 과정을 모두가 공유하는 시대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음날 아침 신문 지면을 통해 다시 확인하는 시대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언론이 여전히 종이신문 전성 시대의 생산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을 검증하는 기사, 진영 논리를 뒤집고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기사가 더 잘 읽히는 시대가 됐다. 뉴스가 넘쳐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진짜 뉴스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언론사에 사실을 전달하는 기자는 많지만 맥락을 짚고 뉴스의 이면을 파헤칠 수 있는 기자가 많지 않은 것은 지금 당장 발생하는 백만 가지의 사건을 좇느라 뉴스의 구조화와 메시지의 전달 방식을 고민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언론의 가장 큰 문제는 데스크가 변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편집국장이나 보도국장의 임기는 길어봐야 2년에서 3년인데, 지난 수십 년 동안 해왔던 방식을 포기하고 싶지 않거나 잘 모르는 영역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2년만 더 가자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장이 바뀌지 않으니 부장들도 바뀔 의지가 없다. 한국에서는 아직 망하는 언론사가 없고 많이 꺾였다고는 하지만 광고 시장도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편집국장이라면 다른 데 이미 난 기사와 다른 데 날 것 같은 기사를 쓰지 못하게 하는 데서부터 변화를 추동할 것이다. 여전히 사건 보도는 저널리즘의 기본이다. 언론의 사명은 권력을 감시·비판하고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의제를 제안하고 토론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현장을 찾고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건 여전히 취재와 보도의 기본이지만 이제는 10개 안팎의 신문·방송이 시장을 과점하던 시대가 아니다.


이제 모든 국민을 위한 모든 뉴스를 다 만드는 시스템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정부 부처마다 기자실에 수십에서 수백 명의 기자들이 몰려 앉아 보도자료를 다듬고 있는 장면은 암담하다. 당연히 보도자료도 처리해야 하고 브리핑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똑같은 100개의 뉴스를 쏟아내는 이런 시스템에서 빠뜨리고 있는 뉴스가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한국에서의 ‘뉴스의 사막’은 어디인가.


지난해 ‘콜롬비아 저널리즘 리뷰’가 공개한 ‘뉴스의 사막 지도(desert of news)’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지역 단위 일간신문이 하나도 없는 지역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 비즈니스의 붕괴와 디지털 전환의 후폭풍이지만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신문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신문이 난립하고 있어서 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한국에서는 뉴스의 사막은 어디일까.


전문은 해당 블로그에서.